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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락꽃 필 때- 박태준의 청라언덕 첫사랑아침을 여는 창/ 수필가 서호련

 

 

 

 

 

 

​'동무생각'의 배경이 된 대구 동산동의 ​'청라언덕'은 대구 근대문화의 중심지다. ​​박태준은 우리나라 현대음악의 선구자로서 1920년 동요 '기럭기럭 기럭이...' 라는 ​'기러기', 1925년 24세의 나이에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의 '오빠생각', ‘​새나라의 어린이’ 등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동요를 ​작곡했고, 1922년 그가 작곡한 우리나라 첫 가곡인 '동무생각(思友)'의 노랫말이 ​바로 이 언덕 위의 돌비에 새겨져 있다.

 

창신학교 설립자의 아들이자, 창신학교 ​국어교사로 있던 노산 이은상은 1년 전 이 학교로 부임한 태준이 지은 동요를 좋아했다. ​태준은 은상과 함께 노비산 언덕에서 바라보는 ​월포의 일몰을 좋아했고, 노마산에서 구마산으로 ​가는 다리 위에서 삶과 예술에 대한 이야기로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은상은 푸른 담쟁이 ​가득한 청라언덕과 좁고 긴 90계단이 ​아름다운 태준의 고향 이야기를 좋아했다. ​태준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은상은 꿈결 같은 ​표정을 지으며 말하곤 했다. ​“박 선생님의 ​이야기는 언제나 고운 詩처럼 아름답습니다.” 그날도 태준은 은상과 함께 노비산 언덕에 앉아 있었다. 암울한 조국의 현실이 둘의 마음을 더욱 어둡게 하였다.

​침울한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문득 은상이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그런데 박 선생님, 선생님의 첫사랑은 어떤 ​분이셨나요?” 라고 물었다. 은상의 뜬금없는 질문에 태준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첫사랑은 뭐, 한번 제대로 이야기도 못했는걸요. 첫사랑이 다 그렇지요. 그러니까 영영 ​가슴속에 박제되는 사랑이고요.”

​​“제가 다니던 계성학교 가까이에 있는 신명여고의 ​여학생이었어요. 함께 교회에 다녔는데,

​한번은 그 여학생이 자두를 한 바구니 가져와 ​교회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어요. ​전 그 자두가 저한테까지 올까 하며 가슴을 졸이며 있었지요. 그러다가 결국 화장실로 ​달아나 버렸어요. 혹시 자두를 못 받게 된다면 ​내가 자리에 없었으니 주지 못했을 거라 위안하려고요. 그 후 돌아오니 오르간 위에 자두 두 알이 놓여 있었어요. 깨끗한 손수건이 ​자두 위에 덮여 있었지요. 그 자두를 한참 ​책상 위에 두고 날마다 바라보았어요. ​더는 둘 수 없을 만큼 썩고 말라버렸을 땐, ​꼭지를 따서 그 꼭지를 습자지에 싸서 보관했지요. ​​교회로 가려면 청라언덕을 지나가야 했어요. 여학생은 저녁 예배를 드리러 그 길을 지나곤 했는데, 전 오르간 연습을 하다가도 그 시간이 ​되면 언덕으로 가 그 여학생이 지나는 걸 ​바라보았어요. 손수건을 전해주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어요. 언젠가는 다가올 ​그 시간을 아껴두고 싶었거든요. 어느 날 ​굳은 결심을 하고 그녀를 기다렸어요. ​'자두 고마웠어요'라는 말을 수백 번도 ​더 연습했지요. ​라일락 이파리가 잔뜩 두꺼워진 칠월 하순이었는데, 그즈음 그런 말이 유행하고 ​있었어요. '사랑의 맛을 알려면 라일락 ​이파리를 씹어보라'는. ​하지만 라일락 이파리가 어떤 맛인지는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문득 저는 그 맛이 궁금해졌어요. 사랑의 맛이 ​궁금해졌던 거지요. 손을 뻗어 연한 잎 하나를 ​떼서 입안에 넣었는데. 아, 그 맛이란! 그건 먹어보지 않고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맛이었어요. 정말이지 죽을 것 같은 맛이었는데, ​뱉어버릴 수가 없었어요. 그러면 그 기다림이 ​허사가 되고 말 것 같았거든요. 그때였어요. 멀리 그녀의 모습이 보였어요. 기다림은 그렇게 길었는데, 그녀의 걸음은 어찌나 빨랐던지 내가 이파리를 다 씹어 삼키기도 전에 그녀는 ​내 코앞에 마주 있었지요. 아직도 입안에 가득한 그 맛 때문에 혀가 얼얼하고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해졌지요. 그때 제가 어떻게 ​한 줄 아세요? 바보 같게도 ‘라일락 고마웠어요’ 라고 말하고 말았어요. 어휴, 그렇게 골백번 ​연습한 말을 두고 라일락이 고맙다니요.”

​​순진한 아이처럼 귓불이 붉어진 태준을 ​바라보며, 은상은 배를 잡고 웃었다. ​“아이고, 도대체 그 이파리 맛이 어땠게요?” “그건 이 선생님이 직접 맛보셔야 해요. 사랑의 맛이 그런 것이라는 걸 절감하게 될 ​테니까요.” 그리고 태준은 얼굴을 활짝 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여학생이 어떻게 ​한 줄 아세요? 절 보며 웃었어요. 제게 눈을 ​맞추고 소리 없이 빙그레 웃었답니다. ​​그 후 그녀는 말 한마디 없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버렸어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은상이 갑자기 생각난 듯, 수첩을 꺼내 무언가 끄적이기 시작했다. ​“박 선생님, 선생님 곡에다가 그 여학생의 ​이야기를 담으세요, 그러면 그 소녀와의 사랑을 노래 속에서나마 이룰 수 있지 않겠어요? ​제가 가사를 써 드릴 테니 곡을 붙여보시겠어요?”

잠시 후 은상은 태준의 고향 추억과 눈앞에 ​펼쳐진 월포 바닷가의 풍경을 담은 詩를 ​건네었다. ​수첩을 받아든 태준의 눈동자가 ​따스해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촉촉이 젖어들었다. ​“정말 아름다운 노랫말이군요.”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적에, 나는 흰 나리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태준은 며칠 전에 작곡한 곡을 떠올렸다. 그리고 창포물을 들인 듯 윤기 나던 소녀의 ​검은 눈썹과, 그 눈썹 아래 싱그럽던 소녀의 ​미소가 태준의 뺨을 조용히 만지고 지나갔다. 멀리 파도 속으로 백합 같은 소녀의 희디흰 ​얼굴과 저녁 조수처럼 떠난 흰 새 같은 兄의 ​얼굴이 썰물처럼 밀려왔다가 사라지곤 했다.

박태준 선생의 첫사랑은 ​'동무생각'에서 영원히 숨 쉬고 있다. 나는 왜 그리도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 마음이 ​쓰이고 가슴이 아픈 걸까? 사랑! 여느 사람들에게는 ​일반적인 아름다움이겠지만, 나는 아니다. ​아프고도 슬프다.

 

남원뉴스  news@namwo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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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np남원뉴스 - http://www.namwo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3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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