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설마 김병기 대감을 모른다고는 않겠지? 그분이 누구냐? 하늘을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상감마마의 외척이 아니시더냐? 양자로 들어간 김좌근 대감은 영의정이요, 생부이신 김홍근 대감은 좌의정이시니, 그분의 벼슬이 비록 좌찬성이시나, 상감께서 조정의 크고 작은 일을 오직 그분하고만 상의를 하신다고 하니, 권세가 하늘을 찌르는 분이 아니시더냐?”
“그런 귀한 어르신께서 어찌하여 미천헌 저를 부르셨으끄라우?”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송흥록이 묻자 감사가, 네가 정녕 그분을 모른단 말이냐? 하고 되물었다.
“금시초문이구만요. 소리나 허는 미천헌 지가 어찌 한양의 높으디높은 대감님얼 알겄습니껴? 그런 함자럴 가지신 분 앞에서는 소리럴 헌 일도 없구만요.”
“소리얘기가 아니니라. 그분 말씀으로는 벌써 십년도 더 전이라고 하든가? 충청어사로 내려오셨다가 속리산 어느 골짜기에 허기가 져서 쓰러져 꼼짝없이 죽을 목숨이 너로하여 살아났다가 하셨니라. 네가 혹시 그런 일이 있느냐? 길을 가다가 허름한 선비를 구해준 일이 있느냔 말이니라.”
감사의 말에 송흥록이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이 있었다. 백운암에서 나와 조선팔도를 유랑삼아 돌아다니고 있을 때였다. 법주사에서 하룻밤 신세를 질까하고 속리산 골짜기를 올라가고 있을 때였다. 남루한 옷차림에 헐거워진 갓을 썼을망정 한눈에 보기에도 양반임이 분명한 사내 하나가 눈밭에 쓰러져있었다. 앞뒤 돌아볼 것도 없이 들쳐 업고 가까운 주막으로 달렸다. 주모에게 부탁하여 따뜻한 물을 먹이고 미음을 떠 넣어주고 한바탕 법석을 떨고 나자 장년의 선비가 부스스 깨어났다.
“인자사 정신이 드시오? 나넌 팔자에 없는 송장얼 치는가 걱정이 태산 같았소이.”
송흥록이 반가움에 소리를 지르자 선비가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손가락으로 발목을 가리켰다.
“왜라우? 발이 아프시오?”
송흥록이 선비의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리자 퉁퉁 부은 발목이 드러났다.
“사실은 눈길에 미끄러져 발목을 삐었소. 몇 끼 굶어 허기는 졌다고 하나 발이 온전했다면 눈밭에서 얼어 죽을 걱정을 했겠소. 주모한테 부탁하여 부은 곳에 뜨거운 물수건으로 습포를 좀 해주겠소?”
“그러지라우. 그것이사 어려울 것이 있겄소. 헌디, 먹물깨나 묵은 양반인 모냥인디, 댁이 어디시오? 내가 사람얼 사서라도 연락얼 허리다.”
송흥록의 말에 선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집이 없다는 소린지 그럴 필요가 없다는 소린지 알 수 없는 영문이었다. 송흥록이 전대를 풀어 엽전을 넉넉하게 꺼내어 주모에게 주며 선비를 부탁했다.
“이 돈이면 선비께서 한 달언 넉넉히 머물만 헐 것이요. 약얼 사다 돌라면 사다드리고, 삔 곳에 습포럴 혀 돌라면 혀 드리고, 밥이랑 찬이랑 술이랑 안 모잘라게 잘 대접혀 주시씨요.”
“날이 이미 저물었는디, 생원님언 어찌허실라고유? 선비님이랑 한방거처가 껄쩍지근하면 다른 방도 있는디유.”
“나넌 원래가 주막에서 잠얼 안자요. 가다가 어디 부잣집 사랑방에서라도 신세를 지지요. 캄캄한 밤길이라고는 하나 내가 귀곡성얼 부르면 날 잡으러 오던 귀신들도 놀라서 도망얼 갈 것인깨. 산짐승들이사 내 동무들이나 마찬가지고. 몸조리 잘 허시씨요, 선비님.”
송흥록이 주막을 나와 여남은 걸음 법주사 쪽으로 옮겼을 때였다. 뒤에서 생원님, 생원님, 하고 부르는 소리가 따라왔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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