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내관이 찾아와 상감의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내 잠시 다녀올 것이니 국문을 계속하도록 하시오.”
상감이 대전으로 돌아간 다음에 최항이 말했다.
“박성간은 듣거라. 네가 정녕 무령군의 집에서 해를 쏘아 맞혔다는 말을 들었느냐?”
박성간이 최항과 김질의 눈치를 살피다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했다.
“예, 쇠네의 귀에는 그리 들렸습니다.”
“저 놈을 매우 쳐라.”
최항의 명에 군사들이 박성간의 엉덩이를 곤장으로 후려쳤다.
“아이고고, 나 죽소. 사실을 말할테니 그만 때리시오, 그만. 쇤네는 무령군대감의 집에서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박성간이 이내 꼬리를 내렸다.
“네가 들은 말이 아니라면 누가 너한테 그걸 시키더냐? 그렇게 말하라고 일러주더냐?”
최항의 물음에 박성간이 김질을 쳐다보았다.
“네 놈이 어찌 나를 보느냐? 여봐라. 저 놈을 죽을 만큼 곤장으로 치거라.”
김질이 고함을 질렀으나, 군사들이 이번에는 곤장을 들지 않았다. 추국관은 김질이 아니라 최항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대전내관이 나와 최항에게 말했다.
“주상전하께오서 추국을 중지하고 무령군을 돌려보내라는 하명을 내리셨소.”
그날밤이었다.
인수대비전에서 사람이 나왔다.
“대왕대비께오서 무령군을 찾으십니다.”
그제서야 자광은 낮에 추국 도중에 자신을 풀어 준 것이 대왕대비인 것을 알았다.
대왕대비전에 들자 인수대비가 웃으며 말했다.
“어리석은 자의 말을 믿고 자칫 충신 하나를 죽일 뻔 했소. 상감이 아직 어리고, 조정이 불안한 가운데 그런 말을 들었으니, 얼마나 놀랐겠소. 무령군의 죄 없음이 밝혀졌으니, 앞으로는 더욱 지극정성으로 상감을 보필하도록 하시오.”
“소신, 충심으로 받들겠나이다.”
자광이 절하고 대왕대비전을 물러 나왔다.
‘내가 바늘끝 만큼의 틈만 보여도 저들은 그 틈을 후벼파서 동굴을 만들어 나를 옭아맬 것이 아닌가? 둘러보면 세상천지에 모두가 내 적 뿐이로구나. 내 편은 오직 나 하나 뿐이구나.’
자광이 탄식했으나, 스스로를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신분을 들먹이며 업신여겨도, 하는 일마다 반대상소를 올리고 상감에게 간하는 일이 벌어져도 자광은 그것이 상감과 백성을 위하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상감이 등극하고 일곱 해가 지나고 어렸던 상감이 성년이 되었는데도 조정은 여전히 대왕대비의 손에서 놀아나고 있었다.
대왕대비는 한명회를 비롯한 몇 몇 대신들과 조정 일을 의논하고 처리해 나갔다.
하루는 대전에서 대왕대비가 말했다.
“이제 상감의 연치 만기를 다스릴만하니, 정사를 돌려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다른 대신들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고, 한명회가 나섰다.
“대왕대비마마,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나이까? 지금 만약 주상에게 정사를 돌려주신다면 이는 국가가 백성을 버리게 되는 일이고, 후일에 이 대궐 안에서 비록 술을 마시더라도 마음이 편안할 수가 있겠습니까? 노산군의 나이가 어린데도 보호하는 사람이 없어 간사한 신하들이 반란을 일으킬 수가 있었는데, 다행이 우리 세조대왕께서 반역한 무리를 목 베어 제거함으로써 나라가 편안하게 되었사옵니다. 아직 중전이 정해지지 않았는데, 정사를 돌려주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한명회의 말에 자광의 등골이 서늘해 졌다.
‘감히 상감을 노산군에 빗대다니? 한명회가 치매인가? 아니면 안하무인인가? 아니면 중병이 들어 사리분별이 어려운 것인가? 대궐 안에 오직 대왕대비 밖에 없다는 소리가 아닌가? 중전이 정해지지 않아 정사를 돌려줄 수 없는 것이라면 세조대왕께서 이미 중전이 있는 노산군의 왕위를 찬탈한 일을 어찌 설명할 것인가?’
자광이 주먹을 불끈 쥐는데, 대왕대비가 말했다.
“상당군의 말에도 일리가 있으니, 천천히 의논해 봅시다.”
말하는 투로 봐서 대왕대비도 수렴청정을 거두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이날 밤 자광은 목욕재계하고 서탁 앞에 앉아 상감께 올리는 긴 상소문을 써내려갔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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