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규는 한양에서 한 달을 머물렀다.
내일 남원으로 떠난다면서 아버지가 자광을 불러 앉혔다.
“남원에 가셔야 두 분이서 사실 것인데, 그냥 한양에 계시지요.”
“아니다. 이 아비는 남원이 좋다. 남원에서 살고 싶다. 너를 부른 것은 다른 일이 아니고, 내일 떠나기 전에 상감을 알현하고 벼슬을 사양할까 해서다.”
“벼슬자리를 사양하신다구요?”
“무릇 벼슬아치들은 그 직에 합당한 공을 나라에 세워야 한다. 헌데 나는 이미 늙었고, 상감이 내게 내리신 벼슬에 걸맞는 공을 세울 방법이 없구나.”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다음날 유규가 상감을 찾아가 엎드려 고하였다.
“소신, 이제 하향할까 하옵니다. 자식의 작은 공만 믿고 전하께오서 내리신 중추부 첨지사의 벼슬을 넙죽 받았사옵니다만, 신은 이미 늙었고, 병이 들어 전하의 하해같은 은공에 보답할 길이 없나이다. 부디 벼슬을 거두어 주시어 소신을 편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유규가 간절하게 청하자 상감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짐이 이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무령군 때문이었소. 자식의 공을 부모가 조금 나누어 가진다고 해서 크게 허물이 될 일도 아니잖소? 공은 짐의 뜻을 거절하지 마시오.”
“아니옵니다, 전하. 신하는 신하의 도리를 다하여 전하께오서 선정을 베푸시도록 미력한 힘이나마 보태야 하는데, 소신은 늙고 병들어 그럴 힘이 없나이다. 부디 소신의 뜻을 굽어 살펴 주시옵소서.”
유규의 간절한 청에 잠시 궁리한 상감이 말했다.
“내가 공을 자헌대부 중추부지사로 삼을까 하오. 부디 사양하지 마시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하오나, 그 역시 소신은 받을 수 없나이다. 부디 소신의 마음을 편케하여 주시옵소서.”
유규가 눈물까지 글썽이자 상감이 잠시 바라보다가 단안을 내렸다.
“알겠소. 어린 짐이 노구를 끌고 한양까지 오신 공의 뜻을 거스르면 안 되겠지요. 벼슬은 공의 뜻에 따르되 그 벼슬에 합당한 녹을 남원고을에서 지급하도록 하겠소.”
“소신이 남원백성을 위하여 한 일이 없는데, 어찌 녹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거두어 주시옵소서.”
“유공은 짐의 작은 정까지 사양하지 마시오. 어찌 공이 없다 하시오? 무령군 유자광이 남원고을에서 난 것만 가지고도 충분히 녹을 받을만 하오.”
상감의 말투가 간절했다.
유규가 상감께 두 번 절하고 대전을 나왔다.
남원으로 돌아가면서 유규가 말했다.
“자광아, 앞으로 너는 끊임없는 모함을 받을 것이다. 네 재주가 필요할 때면 간이라도 떼어줄 듯이 알랑거리다가 너를 이용하여 뜻을 이루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너를 내치려 들 것이다. 그걸 잊지 말거라. 한 가지 더 당부할 것은 네 영달을 위하여 남을 깎아내리지 말거라. 남이 너를 모함한다고 하여 함께 모함하지 말거라. 바른 길을 가다보면 일시적으로는 곤란한 일이 생겨도 결국은 진실이 밝혀질 것이다.”
“소자, 아버지의 말씀을 명심, 또 명심하겠나이다.”
그렇게 유규는 남원으로 돌아갔다.
자광이 끊임없이 모함을 받을 것이라는 유규의 말은 틀림없었다.
어린 임금 예종이 급작스레 죽고 난 얼마 후였다.
<다음호에 계속>
남원뉴스 news@namwonnews.com
<저작권자 © np남원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