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왔느냐? 그 사이에 훤훤 장부가 되었구나.”
자광이 안국방에 있는 집으로 찾아가자 막 퇴청을 한 자환이 반갑게 두 손을 잡으며 말했다.
“형님, 그동안 강령하셨습니까?”
“글쎄다. 몸에 기열이 있어 코피를 자주 흘리는 것은 너도 알고 있잖느냐? 그래서 그런지 종종 서늘증이 일어나는구나.”
“찬 음식은 여전히 못 드시지요?”
“못 먹는다. 그나저나 내가 듣기로 벌써 삼년 전에 지리산에서는 나왔다고 했는데, 어찌 이제야 왔느냐?”
“삼천리강산을 두루두루 돌아다녔습니다.”
“견문을 넓히는 것도 좋은 일이지. 참, 너 송림사에서 김종직을 만났었다면서?”
“하룻밤 함께 잤습니다.”
“얼마 전에 함양군수로 내려 갔니라.”
“그래요? 학문의 깊이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려말 정몽주와 길재를 이어 도학의 대가라고 인정을 받고 있는 사람이 아니더냐? 따르는 후학들이 많은가 보더라.”
“저한테도 소개를 시켜준다고 하였습니다.”
자광의 말에 자환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무슨 말씀입니까?”
“네 출신성분을 어디서 들었던 모양이더라. 함양군수로 내려가서는 제일 먼저 한 일이 학서루에 걸린 네 시의 편액을 내려 부수는 일이었다는구나. 감히 얼자 놈의 시를 걸어 놓다니, 유서 깊은 학서루에 먹칠을 하는 것이라고 소리치면서 말이니라.”
“그 시는 김종직이 스스로 가져간 것입니다. 자기 손으로 편액을 걸어 놓고 자기 손으로 그걸 떼어 부수었군요.”
“맘 상해하지 말거라. 학문을 한다는 사람들의 편협함을 너도 잘 알지 않느냐?”
자환이 자광을 달랬다.
그러나 자광은 기분이 나쁘고 말 것도 없었다.
벌써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서방님, 저 좀 들어갑니다.”
문 밖에서 형수 윤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환이 얼핏 당황한 기색을 드러내고 있는데, 윤씨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자광이 얼른 일어나 허리를 굽혔다.
“형수님, 그동안 강령하셨습니까?”
“자광이 네가 여기는 무슨 일이더냐?”
윤씨의 안색이 밝지를 못했다.
“예, 서방님과 아씨 마님께 인사를 여쭈러 왔습니다.”
자광이 얼른 얼자의 신분으로 돌아갔다. 그래도 윤씨의 얼굴은 여전히 구더기라도 씹은 상이었다.
“설마 내 집에서 신세를 지겠다고 온 것은 아니겠지?”
자광이 미처 대꾸를 못하는데 자환이 나섰다.
“부인, 동생이 형님 집을 찾아온 것이 무슨 잘못이요? 자광이를 너무 다그치지 마시오. 내 집 작은 사랑에 머물게 할 것이요?”
“뭐라구요? 서방님,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동생이라구요?”
“한 아버지 밑에서 났으니, 동생이 아니고 무엇이요?”
“엄연히 출신성분이 다른데 동생이라니요? 당신 집에서는 그럴지 몰라도 우리 집에서는 어림도 없는 소리예요. 당신, 우리 아버지가 재상을 지내셨다는 것을 설마 까먹고 있는 것은 아니지요? 아버지가 아시면 당신과 의절을 하자고 하실걸요?”
“부인이 뭐라고 하건 자광이는 내 동생이요. 부인도 서방님으로 깍듯이 대해주길 바라오.”
“난 그리 못해요. 자광아, 네가 내 집에서 하인으로 있으려면 있고, 그렇지 않으면 나가거라.”
“예, 안 그래도 인사만 드리고 가려고 했습니다.”
“네 말을 믿겠다. 앞으로는 내 집에 함부로 들락이지 말거라.”
말을 마친 윤씨가 찬바람을 일으키며 사랑을 나갔다.
“미안하구나, 자광아.”
“형님께서 저한테 미안해 하실 일은 아닙니다. 안 그래도 안국방 언저리에 방을 한 칸 마련해 놓았습니다. 하면 저는 이만 일어날랍니다. 부디 건강을 챙기십시오.”
“미안하구나. 미안하구나, 자광아.”
자환이 엉거주춤 따라 일어서려다가 현기증이라도 났는지 털썩 주저 앉았다.
“형님, 괜찮으십니까?”
자광이 소리치자 자환이 손을 내저었다. 상관하지 말고 그냥 가라는 뜻으로 알아듣고 자광이 사랑을 나왔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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