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좋은 고을에 사는군. 스무살남짓 되었을 때에 벗들과 함께 광한루에 오른 적이 있었지. 산세도 수려하고 광한루 앞을 흘러가는 푸른 요천도 선계처럼 아름답더군. 그런데 남원출신이라니까 혹시 유자환이라고 아는가?”
자광이 무형대사를 흘끔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제 형님이십니다만, 제 형님을 어찌 물으십니까?”
자광이 잠시 고개를 갸우뚱 했다.
“내가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한양의 알만한 선비들은 다 알고 있더군.”
“저는 한 5년 동안 못 뵈어 소식이 두절되었습니다만, 제 형님은 몸도 약하시고 사람들의 입살에 오를 만큼 유명한 분이 아닌데요. 그냥 묵묵히 자신의 일에만 매달릴 분이지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5년 쯤 전이라고 하던가? 지금 상감이 대군으로 있을 때였지. 수양대군이 단종을 무시하고 모든 병권을 장악하여 정난을 준비하고 있을 때에 승정원 주서로 있던 자네의 형님께서 승지 박원형에게 ‘국가의 대사는 군사에 있는 것인데, 수양대군이 어찌하여 전권을 휘두를 수 있습니까? 이 일은 승정원에서 병조와 상의하여 행해져야 합니다’라고 하였다더군. 그때는 이미 임금은 허수아비였고, 모든 실권이 수양대군에게 넘어간 상태였으며 한명회가 살생부를 작성하여 사람들을 무참하게 살육하려고 준비를 마치고 때를 기다리고 있던 중인데, 승정원 주서라는 말단 벼슬아치가 그런 말을 했으니, 함께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릴 수 밖에 없었겠지.”
“그래서 어찌 되었습니까?”
“누군가 그 말을 수양대군에게 고자질을 했던 모양이었네. 모든 사람들이 유자환은 죽었다, 고 여기고 있는데 수양대군이 껄껄 웃으면서 ‘주서가 일의 때를 알지는 못하지만, 그 말이 비범하다’ 고 하여 어찌어찌 정난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정난에 임하여서도 ‘마음대로 군사를 소집할 수 없다’고 하였다던가? 정난이 성공하고 난 다음에 수양대군이 ‘유자환의 기개가 송백과 같다’고 하면서 나중에 임금이 된 다음에도 중히 썼는데, 요즘은 기성군에 봉해져 사헌부 대사헌으로 계시다네. 형제는 닮는다고 하더니, 그대의 눈빛이 형형한 것이 보통이 아님을 알겠네.”
“제 형님께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날 밤 김종직은 자광의 방에서 함께 잠을 청했다.
잠자리에 들기 전, 김종직이 서책을 보고 물었다.
“저 책들을 다 읽었는가?”
“그냥 흉내만 냈습니다.”
“저만한 책을 다 읽었다면 시도 짓겠군. 어떤가? 나하고 시 한 편씩을 지어 현판을 만들어 함양 상림의 학서루에 거는 것이.”
“제가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냥 이름 없는 서생에 불과한 걸요.”
“아닐세. 유자환의 동생이라는 것만으로도 자네는 충분히 자격이 있네.”
결국 그날 밤 자광은 지리산을 소재로 시 한편을 지어 김종직에게 넘겼다.
김종직이 자광의 시를 보고 한 마디 했다.
“지리산의 웅장한 기세와 자네의 호걸다운 기개가 느껴지는군. 자네와 오늘 만난 인연을 소중하게 간직하겠네. 곧 과거를 보고 출사를 하겠지? 나를 따르는 동류와 후학들이 많다네. 기회를 봐서 내 그들도 다 소개시켜 줌세.”
“저야 고마울 따름이지요.”
그렇게 대꾸했지만, 자광은 가슴이 답답했다.
형님 자환은 양반가의 적실이었기에 과거를 보고 출사를 할 수 있었지만, 자신은 과거를 볼 자격도 없는 얼자가 아닌가? 가슴에는 천하를 품고 있지만, 한갓 얼자인 것이다.
‘이자한테 내가 얼자라고 밝히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당장 방을 뛰쳐 나가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으나 자광은 참았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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