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히 주무십시오, 서방님.”
자광이 나지막히 인사를 챙기는데 안에서 형수 윤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과거를 준비한다고 두 해 동안이나 독수공방을 시키더니, 이번에는 혼자 한양으로 간다구요?”
“당분간만 남원에 있구려. 내가 한양에서 자리가 잡히면 불러 올리리다.”
“어느 세월에요? 밤마다 독수공방이니 할머니께서 바라시는 손자는 언제 안겨 줍니까? 차라리 절 내치십시오. 머리 깎고 절에나 들어 갈랍니다.”
“부인, 그걸 말이라고 하시는 거요?”
“왜요? 내 말이 틀렸습니까? 목욕재계하고 기다리겠습니다. 한 식경 후에 내 방으로 오세요.”
형수 윤씨가 찬바람을 일으키며 작은 사랑을 나와 안채로 건너갔다. 그 뒷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몸을 돌리는데, 큰 사랑 문이 열리고 아버지가 기웃이 내다 보았다.
얼른 나무그늘 속으로 몸을 숨겼지만 아버지의 눈에 들킨 모양이었다.
“자광이는 잠시 들어오너라.”
“예, 소인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자광이 큰사랑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네 형이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로 나가게 되었는데, 네 기분이 어떠냐?”
“소인,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저한테 어찌 기분이란 것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끝까지 머슴으로 살겠다는 말이더냐?”
아버지 유규의 눈빛에서 갑자기 서릿발이 일었다.
자광은 대꾸하지 않았다.
아니, 가슴에 쌓아두고 있는 말이야 지리산 수많은 봉우리보다 많았지만 아직은 속내를 털어놓을 때가 아니었다.
“네가 머슴으로 살겠다면 내일부터 나무를 하고 풀을 베어 오너라. 꼴도 보기 싫으니, 나가보거라.”
자광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드리고 큰 사랑을 물러 나왔다.
사흘후였다.
자환이 하인으로 부릴 머슴 하나와 계집 종 둘과 찬모 하나를 데리고 한양으로 떠났다. 한양에는 유규가 사헌부장령과 한성소윤을 지낼 때에 마련해 두었던 작은 기와집이 한 채 남아있어 따로 살림을 장만할 필요는 없었다.
할머니 남씨가 잔심부름이라도 시키라며 자광을 데리고 가라고 했지만 유규가 말렸다.
“자광이는 남원에 남아 있거라. 내가 너한테 시킬 일이 있구나.”
그날 밤에 자광이 큰 사랑 앞에서 고했다.
“소인, 자광입니다.”
이내 안에서 대꾸가 있었다.
“들어 오너라.”
자광이 사랑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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