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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광한루가 창건한 지 600년이 되는 해이다. 그래서 육백 년을 맞는 광한루의 가치를 그 어느 때 보다 깊이 헤아려 보고 광한루원이 완성되어 온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남원은 예부터 뫼와 물이 빼어나고 기름진 들판이 백리에 이르는 자연이 곳 고을인 땅이라 하였다. 사람들은 남원을 ‘천부지지 옥야백리’라 하여 하늘이 고을을 내려주고 비옥한 땅이 백리를 이루어 살기 좋은 곳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고려 예종 24년(1170) 이의방, 정주부 등 무신들이 문신들을 제거하고 반란을 일으켜 명종을 왕으로 추대하여 권력을 장악한다. 그 기간이 100여 년이다. 이때 종3품 전중감에 있던 황공유(黃公有)가 1171년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장수로 피난하였으나 장수 현감이 이의방에게 잘 보이기 위해 황공유를 해하려 하자 이를 피해 남원으로 이거 하면서 장수황씨 남원 정착 조가 되었다.
장수황씨의 시조인 황경(黃瓊)의 10세손 황감평(黃鑑平)이 벼슬길을 단념하고 일재(逸齋)라는 서당을 지어 후학양성에 매진했는데 스승으로 섬기는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광한루는 일재의 서당에서 기원한다. 1418년 5월 11일 판 한성부사에 있던 황희가 세자 양녕대군의 폐출 불가론을 주장하다 태종의 노여움을 사 교하로 유배되었고 그해 고향인 남원으로 이배 되었다. 1419년 남원에서 귀양살이하던 황희(黃喜)는 고을 남쪽에 조그마한 누각을 일으켜 세우니 이것이 광한루의 전신인 광통루(廣通樓)이다. 그 뒤 세월이 흘러 옛 시인들이 자주 찾던 광통루가 황폐해지자 부의 사람들이 이를 애석하게 여겼고 1434년 남원부사 민여공(閔汝恭)이 누각을 중수하고 9년 뒤인 1443년에 관찰사 정인지(鄭麟趾)가 광통루의 아름답고 뛰어난 경치를 보고 광한루(廣寒樓)로 이름 지었다. 하지만 광한루는 온전하지 못하고 여러 차례 재건과 증축을 거듭하며 오늘날 우리나라 4대 누정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광한루는 어떤 곳일까? 광한루는 신선이 되고 싶은 인간의 이상향이 투영된 달나라 궁전이다. 청허부(淸虛府)를 들어서면 이미 월궁에 들어온 것이다. 옥황상제가 사는 월궁으로 가는 길에 삼신산과 호수, 오작교, 자라, 지기석 등 유무형의 이야기들이 펼쳐져 있다. 이는 신선사상과 음양오행사상, 풍수사상 등이 결합 자연 공간적 요소들을 통해 비정하고 있다.
약방아 찧는 토끼, 옥황상제, 칠월칠석 견우와 직녀, 이몽룡과 성춘향의 사랑이 광한루라는 공간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래서 광한루원은 사랑의 공간적 요소를 자원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광한루 600년 무엇을 해야 할까? 우리는 기념일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때는 주제에 맞는 이벤트를 만들어 실행한다. 광한루도 600년 기념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광한루의 어제와 오늘, 미래를 엮는 것이 중요하다. 과거 애환의 기록, 오늘의 가치로 남기고 활용할 사업의 발굴, 미래의 가치로 보존하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기 위한 토대를 만드는 일이다. 광한루가 안고 있는 신화, 인물, 역사, 문학, 자연 등을 하나하나 연결하여 천년 광한루의 생명은 이어가는 노력이 지금은 필요하다.
남원뉴스 news@namwo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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