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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뉴스는 최초 춘향영정과 관련해 남원역사바로세우기시민연대 한병옥 선생이 보내온 글을 3회에 걸쳐 지면에 게재합니다. 글이 주장하는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5. 강신호의 요절과 최봉선 Ⅱ
추리소설을 읽는 것 같은 이 내면의 내용을 밝혀주는 신문자료가 있습니다. 1965년 5월 11일자 조선일보(이하 조선일보라 함)와 1966년 5월 28일자 동아일보(이하 동아일보라 함)의 최봉선과의 인터뷰 기사입니다. 이 기사들을 우리는 수십 번씩도 더 읽었습니다. 그런데도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최봉선 기녀의 말투였습니다.
처음 눈에 띈 것은 ‘“진주 강씨에게 그리게 했다”고 말한다’는 구절이었습니다. 이는 동년배에게도 함부로 쓰지않는 하대의 말이었습니다. 최봉선은 강신호보다 3살이 많습니다. 동생뻘이니까 하대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녀의 신분이 분명한데, 그것도 최봉선은 천한 중에서도 천한 기생 신분이었고 강신호는 양반 부호 집안이었습니다. 나이와 상관없이 최봉선은 강신호에게 그런 하대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다시 보니 ‘품위와 위엄을 갖춘 30대 춘향을 그려 당시 양반 계급의 치장을 시켰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기생 최봉선이가 누군가에게 지시하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요청한다거나 방향 제시 정도가 아닌 지시이며 명령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금액을 떠나서 최봉선은 화가에게 부탁하는 입장이어서 깎듯이 모시는 입장이어야 할 텐데 적반하장도 유분수였습니다. 여기에서 단언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화가가 최봉선의 손 아래 사람이 확실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최봉선이 20대 중반인 나이에 그보다 나이 어린 화가를 찾기는 지극히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화가는 그 천한 기생의 지시와 명령을 고분고분 이행합니다. 그 당시의 세태로 보아 그런 관계는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강신호 화백의 집안은 당시만이 아니라 지금으로 보아도 특이한 집안입니다.
우선 부자였습니다. 진주를 울릴 만큼, 교육독립운동가가 아버지였을 만큼 깨어있는 집안이었습니다. 주목해야 할 사람은 큰형입니다. 백정은 당시 불가촉 천민이어서 신체 어디라도 닿는 것 자체가 모독이었던 신분이었습니다. 이 천한 백정 해방운동을 진주에서 시작하여 전국적인 운동으로 전개시킨 백정해방운동의 창시자였습니다. 인권운동의 최전선에서 반상차별에 항거해 싸웠던 선두주자였습니다. 나이의 차이는 언급할 수 있어도 양반 상놈의 차이는 인정할 수 없는 집안 풍토였습니다.
그 동생이자 아동문학가인 강영호는 방정환 선생과 함께 한 어린이 해방운동의 선두주자였습니다. 이런 집안의 가족이 아니고는 몇 살 많다해도 기생의 지시명령에 따를 위인을 찾을 수 없고 그 기생의 지시와 명령에 고분고분할 수는 없는 시대였습니다.
진주만이 아니라 전국을 털어놓고도, 세계에서도 있기 어려운 관계형성이었습니다. 최근 정보로는 강신호 화백의 작은 형 강영호의 부인이 생전에 춘향초상을 우리 집안 어르신이 그렸다는 말을 가족에게 남겼다고 합니다. 아직 만나보지 못했지만 가까운 시일 내 성사되리라 봅니다.
그런데 아직 풀리지 않은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침략전문국가로 남아있는 일본의 식민지 치하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해도 해방된 조국에서도 왜 최봉선 기녀는 끝까지 강신호 화백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죽어갔을까 하는 것입니다.
제국의 식민지 치하에서는 교육독립운동가이면서 인권운동의 최일선에서 활동했던 집안과 화가인 당사자에게 어떤 위해가 가해질지 몰라서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그려낸 영정에 어떤 위해가 가해질지 모를 염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해방이 되고 나서는 이념이 대립되고 국토가 양단되면서 사상적 대립으로 치닫게 됩니다. 북한은 공산주의 권력이, 남한은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승만 정권이 수립됩니다. 당시 사회주의 성향의 대부분이 남한의 단독정부에 반한 공산주의 계열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강신호 집안은 당연하게도 좌익계열에 서 있었습니다. 이 사실이 밝혀지면 강신호만이 아니라 그 가족 전원에게 위해가 가해질 것을 염려했을 것입니다. 강신호와 그 가족을 보호하고 소중한 영정의 보존을 위해 진주 강씨 외에는 끝까지 발설하지 않은 채 잠들어 버렸습니다. 그렇게 보호 유지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 최초의 춘향제를 발족하게 한 최초 춘향영정 원본입니다. 지금도 박물관 수장고에 처박혀 있습니다.
6. 이제 남원에서는?
“현재는 남원에서 부산관이라는 요정을 하고있는 최씨는 30여 년을 모셔오던 춘향 영정을 반드시 제자리에 모시고야 말겠다고 관에 선전포고를 한다”
이 기사는 1965년 5월 11일 조선일보에 올라온 최봉선 기녀의 거의 마지막 인터뷰의 끝 대목입니다. 해방된 지 20년이 지났고 4.19 민주혁명 정부가 수립되고도 5년이 지난 후의 기사입니다.
남원의 춘향제를 만들어 35년 세월이 지난 뒤에 춘향 영정을 만들어 춘향제를 발족시킨 할머니 노기가 피를 토해내듯 한 말이었습니다. 선전포고를 하듯.....
남원에서는 그 최봉선 기녀가 만들고 지켜온 춘향제를 통해 1년을 살았다 할 만큼 춘향제가 기여한 공이 큽니다. 그런데 그 당사자인 최봉선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어갔는지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최봉선이 생명의 위험을 안고 피난시켰던 그 최초 영정에도 남원은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가 보아온 바와 같이 역경을 통해 보존되어 온 최초 영정을 박물관 수장고에 유폐시킨 것이 얼마나 원통하고 분했을 텐데 관에 선전포고를 해 놓고 최봉선 기녀는 어떻게 눈을 감으셨을까?
이런 최초 영정의 역경을 알아보려 하기라도 한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요? 그러면서 지금도 친일선두거두 김은호의 일본식 미성년자 왜식 춘향을 그토록 아끼고 보호했을까요? 그 역경을 거치지 않을 수 없었으면서도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하자는 것일까요?
아직도 시한이 모자라는 것일까요? 적어도 100년은 지나야 한다는 것일까요? 어차피 늦었습니다. 그러니까 더 늦추어도 상관이 없는 것일까요?
우리는 여기에서 한 얘기가 모두 진실이고 사실이라고 고집하지는 않습니다. 앞으로도 밝혀야 할 것들이 더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입증해야 할 기관이나 임무는 남원시 의회에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잘못된 것이 있다면 밝혀야 하고, 주장이 잘못되었으면 설득해야 할 의무가 남원시와 의회에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 출범한 남원시장과 시의회에 간곡하고 정정당당하게 요구합니다.
첫째, 춘향제를 발족시키게 한 최초의 춘향 영정을 제자리에 봉안하십시오.
그런데 그 제자리가 어디인지가 또 문제입니다. 지금의 춘향사당이 1931년 춘향제가 발족될 때의 사당인가, 아니면 일본제국이 신사처럼 만들었던 사당인가를 먼저 확실히 해야 합니다. 그 진위 여부부터 밝혀야 하고, 지금 이 시간에도 최초 춘향 영정이 수장고에 갇혀있는 것이 안타깝다면 현재 사당으로 쓰고 있는 건물을 리모델링해서라도 최초 영정을 수장고에서 해방시켜야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최초 춘향 영정의 화가를 공식적으로 밝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주 강씨 강신호가 그린 작품이라 믿고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진짜 작가가 누구인지 밝혀내야 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 즉시 국가문화유산으로 신청하여 국가문화재에 등재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유네스코 문화재 등록 운동을 모든 시민들과 함께 해야 할 것입니다.
이 모든 작업은 2030년까지 완료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2031년 춘향제 100주년 기념식을 역사 앞에 떳떳하게 제대로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일은 신임 시장님 단독 결정으로도 가능하겠습니다만 시의회와 함께라면 금상첨화일 것입니다. 이 일단의 과정에서 어려움이 있다면 우리들 남원역사바로세우기를 앞장세워도 될 것입니다.
정신이 바르고 건강하며 바른 역사관으로 남원정신을 일깨워나가는 시정과 시의회가 되기를 충심으로 바라며 긴 얘기 마무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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