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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이 되면 최순애의 ‘옵바생각’이…아침을 여는 창/ 수필가 서호련

 

 

 

 

 

 

10월이 되면 어김없이 귀뚤이가 울어댄다. 귀뚤이가 울면 ‘오빠생각’이 떠오른다. 언제 들어도 애틋하고 동심에 젖어지는 노래다. 1925년, 소파 방정환 선생이 펴내고 있는 잡지 <어린이> 11월 호 58페이지에 ‘옵바생각’ 이란 제목의 동시가 실렸다. <옵바생각>은 당시 보통학교 4학년이던 12세 소녀 최순애가 잡지 <어린이>에 공모 입선한 작품이다. 그리고 가곡 ‘동무생각’을 작곡한 박태준 선생이 곡을 붙여 국민적 동요가 되었다.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때/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구두 사 가지고 오신다더니/ 기럭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 귀뚤귀뚤 귀뚜라미 슬피 울건만/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가 열두 살 소녀에 의해 씌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최순애는 생전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오빠생각’이라는 시를 쓰게 된 동기를 밝혔다.

“그 당시 나에게는 여덟 살 위인 오빠(최영주) 한 분이 있었다. 딸만 다섯에 아들 하나뿐인 우리 집에서 오빠는 참으로 귀한 존재였다. 오빠는 동경으로 유학 갔다가 관동대지진 직후 일어난 조선인 학살 사태를 피해 가까스로 돌아왔다. 그날 이후 일본 순사들이 늘 요시찰 인물로 보고 오빠를 따라다녔다. 오빠는 고향인 수원에서 화성소년회를 조직하고 소년운동을 하다가 서울로 옮겨 방정환 선생 밑에서 독립운동에 열심이었다. 오빠는 집에 한 달에 한 번 정도밖에 오질 않았다. 오빠가 집에 올 때면 늘 선물을 사 왔는데 어느 날엔 ”다음에 올 땐 우리 순애 고운 비단구두 사가지고 올게.” 라고 말하고는 서울로 떠났다. 오빠는 뜸북새, 뻐꾹새 등 여름새가 울 때 떠나서 기러기와 귀뚜라미가 우는 가을이 와도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과수원 밭둑에서 서울 하늘을 바라보며 오빠를 그리워하면서 울다가 집에 돌아오곤 했다.”

오빠는 방정환 선생과 함께 <색동회> 활동과 <어린이> 관련 잡지의 편집업무로 서울에서 거주하였다. 그래도 주말이면 수원본가에 내려오곤 했지만 일이 바빠지다 보니 나중에는 본가에 오는 횟수가 줄어들고 몇 달이 지나도 소식이 없으니 순애를 비롯한 집안 식구들의 걱정이 대단 했던 것 같다.

이 오빠생각엔 초여름 야산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뜸부기와 뻐꾹이 울음소리를 통해 오빠를 기다리는 소녀의 가냘픈 마음과, 가을이 되면 구슬피 울며 남쪽으로 날아가는 기러기, 그리고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며 오빠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품고 있었던 어린소녀의 한이 그려져 있다.

이제 때는 뜨거웠던 여름도 지나, 기러기는 떼 지어 북에서 내려오고 귀뚜라미는 ‘귀뚤 귀뚤’ 우는 찬 바람 부는 가을로 접어든다. 서울에서 며칠 있다가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겠다는 오빠는, 늦으면 늦는다는 소식이라도 보내오면 좋으련만 아무 소식도 없이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지는 것만 바라보며 오빠를 그리워하는 어린동생의 안타까운 모습이 아련하기만 한다.

당시 아동문학가 이원수(1911-1981 경남양산)는 이 시를 보고 크게 감동을 받아 12세 소녀 최순애에게 편지를 보냈다. 최순애와 아동문학가 이원수의 인연의 시작이다. 당시 이원수는 14세로, 두 사람은 불과 2살 차였다. 최순애가 ‘오빠생각’ 이란 동시를 쓴 그 다음 해 ,1926년 열네 살 소년 이원수의 ‘고향의 봄’이라는 동시도 <어린이> 4월호에 실리게 되었다. 최순애와 이원수는 편지와 문학글로 10여년의 팬 벗을 맺어 오면서 서로의 얼굴도 몰랐지만 마침내 결혼까지 약속하게 되었다. 그들은 드디어 수원역에서 첫 번째 만남을 약속했지만 그날 그 자리에 이원수는 나타나지 않았다. 당시 이원수가 민족의식에 눈을 뜨며 참가한 반일 독서모임인 ‘함안독서회’ 사건으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일 년간 감옥에 있었던 것이다. 최순애의 집에서는 이런 예비 사위가 못마땅해 다른 혼처를 구해서 권해도 보았지만 최순애는 이를 완강히 거부했다. 그리고 일 년 후 이원수가 풀려나서 최순애의 집으로 달려오면서 극적인 해후를 했다. 이들은 1936년 6월에 결혼식을 치르고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다.

이원수의 ‘고향의 봄’이라는 동시는 작곡가 홍난파가 작곡하여 전 민족의 노래가 되었다. 필자가 한·중 국교가 정상화 되던 해에 중국 만주에 들어가서 연변동포들과 함께 백두산엘 등반했다. 점심시간에 함께 ‘고향의 봄’을 합창했는데 동포들 모두가 서슴없이 목청을 높여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우리가 한 민족임을 다시 확인하는 자리였다. 고향의 봄이야 말로 민족의 노래라 아니할 수 없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 꽃 살구 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은 오빠를 그린 순애의 시를 보고 가곡 ‘동무생각’을 작곡한 25세의 대구 계성학교 문예교사 박태준 선생이 곡을 붙여 발표하면서 이 노래는 삽시간에 번져갔다. 어린이뿐만 아니라 어른들의 마음속에까지 이 노래가 깊이 파고 든 것은 나라 없는 설음과 가족을 빼앗긴 한이 맺혀 있었기 때문이다. 최순애 만의 기다림이 아니라 온 국민의 기다림이었다. 그리고 조국의 광복을 기다리는 겨레의 마음이 이 노래를 함께 부르게 했던 것이다.

박태준(1901-1986 경북대구)이 이 시의 마지막 부분을 작곡할 때 흐르는 눈물이 오선지를 흥건히 적셨다고 한다. 최순애가 ‘옵바생각’을 지을 당시 1925년은, 우리 민족에게 가장 암울했던 때이다. 젊은이들은 서울로, 동경으로, 간도로, 만주로 어디든 떠날 수밖에 없었다. 나라의 독립도 쟁취해야하고 어쩔 수 없이 학도병이나 징용으로 끌려가기도 했다. 이 동시야말로 떠나간 사람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애틋한 마음의 표현이었다.

소파 방정환은, 독립운동가 이자 어린이 교육자, 아동문학가로서 어린이날을 만들었다. 1920년 잡지 <개벽> 3호에 <어린이 노래>를 발표하고 이 땅에서 최초로 ‘어린이’ 라는 말을 만든 분이다. 1931년 향년 33세로 서울대 병원에서 병사하기 전까지 불꽃같은 삶을 산 아동문학인의 선구자적 큰 스승이었다.

오빠 최영주는 무덤도 없이 홍제원 화장장 납골당에 안치된 그분을 윤석중 선생과 뜻을 모아 망우리 아차산에 묘소와 묘비를 세웠고 최영주 자신도 방정환 선생 옆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하고 1944년 38세의 나이로 요절하여 방정환 선생 옆에 묻히었다. 최순애 아들의 증언에 의하면, 어머니 최순애는 그 후 꾸준히 동시를 발표했는데, 시집을 내려고 준비한 원고가 6.25전쟁 중 타버려서 남아있는 시는 몇 편 되지 않는다고 했다.

(2025년 내년은 최순애의 ‘옵바생각’이 <어린이> 잡지에 실린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최순애의 고향 수원에서는 내년 5월에 세울 <오빠생각> 노래비 건립 준비로 한 참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남원뉴스  news@namwo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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