秦(진)·漢時代(한시대)의 관상
秦의 중국 통일 시기는(BC221-BC207) 15년의 짧은 시기였지만 진시황은 사상통일을 위해 분서갱유를 실시하는 등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진시황은 玄學(현학)과 方術(방술)에 심취하였기에 『周易(주역)』과 방술서가 존속되었다. 相書(상서) 또한 후대에 전해질 수 있었으며 이미 일반인들에게도 보급되어 있었다. 形色(형색)·氣色(기색)·六親(육친)·五岳(오악)·音聲(음성)·骨格(골격) 등 다양한 상법들이 발전 하였다.
兩漢(양한)시기에는 여포라는 상인이 漢高祖(한고조) 유방의 상을 보고 장차 천자가 될 것을 豫測(예측)하여 자신의 딸(呂太后)을 시집보낸 일화가 유명하다.
여공이 말하기를 “신은 젊어서부터 사람의 관상을 보는 것을 좋아하여 다른 사람의 관상을 본 일이 많았는데 당신과 같이 貴(귀)한 相(상)을 본적이 없습니다. 자신을 귀하게 여기십시오. 내게 女息(여식)이 하나 있는데 몸종으로 쓰시오.” 그 후 과연 임금이 되고 그의 딸은 악독하기로 유명한 여후가 되었다.
한무제 때 장수 伊陵(이릉)이 5천의 유격대를 인솔하고 흉노족 토벌에 나섰으나 간신의 계략으로 패했다. 무제는 이릉이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하기를 원했다. 무제는 관상가를 불러 이릉의 처와 그의 어머니 상을 보게 하였으나 그들에게는 상을 당할 기색은 없고 오히려 그들의 상이 불길하다고 했다. 후에 이릉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족을 몰살시켰다.
한나라 초기에도 許負(허부)라는 관상가가 있었다. 고포자경, 숙복, 당거와 더불어 중국 4대 관상가로 알려져 있다.
진나라 말경 한신의 상을 보고 그의 운명을 정확하게 예언하기도 했다. 그는 耳目口鼻(이목구비)의 상을 최초로 기록한 책인 『人倫識鑑(인륜식감)』을 저술하기도 했다. 20세기 초 敦煌石窟(돈황석굴)에서 발견된 『돈황문헌』의 상서 중 『허부상서위본』이 발견되었다. 허부는 한고조 첩이된 薄姬(박희)의 관상을 보고 후에 천자가 될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한대 역시 춘추시대와 마찬가지로 관상을 판단하는 주요항목으로 얼굴의 생김새, 목소리, 기색, 풍모를 보았다.
왕망은 큰 입에 오그린 턱을 지니고, 돌출된 눈에 적색을 띠고, 큰 목소리에 쉰 소리를 하며, 키는 7척 5촌이요 두터운 신발을 신고 높은 관을 쓰기를 좋아했으며, 털이 달린 옷으로 치장하고, 가슴을 펴고, 시선을 높이 두고 좌우를 내리 보았다.
어떤 사람이 왕망의 형모에 대해 물었다. “왕망은 올빼미 눈과 호랑이 입, 시랑의 목소리를 지닌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라고 표현했다. 한대에는 관상뿐만 아니라 모든 술서가 가장 발달했다.
예로부터 인재 등용에 요임금은 容貌(용모)를 보고, 순임금은 顔色(안색)을 보고, 탕임금은 音聲(음성)을 듣고, 문왕은 사람의 風貌(풍모)를 보고 인재를 선발했다는 기록이 『大載禮記(대재례기)』「소한」에 있다. 문헌의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이미 기원전 3000년 전부터 상을 봐왔던 것으로 보인다. 춘추전국시대에도 『좌전』의 기록에 叔服(숙복)이라는 관상가가 공손오의 아들 관상이 魯나라에서 후사를 이을 것이라고 상을 봐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렇듯 관상 뿐 아니라 행동으로 사람의 심성과 됨됨이를 판단했던 것이다. 공손한 언행으로 그 사람의 길흉을 판단할 수 있다. “적선지가 필유 여경이라”.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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