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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역병의 방역과 민생노상준/ 남원학연구소장, 전 남원문화원장, 위생약국 약사

 

 

 

 

고금을 막론하고 역병(전염병)이 나돌면 큰 사회적 문제가 발생한다. 우리나라 역병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기원전 15년 백제 온조왕 4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특히 조선 후기에 들어서서는 어느 시대에도 볼 수 없을 만큼 역병이 크게 유행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을 찾아보면 모두 79회나 있었고 그 중 100만 명 이상 죽은 경우만도 여섯 차례나 등장한다. 1807년의 경우「증보문헌비고」에 나온 당시 인구는 7,561,463명이었는데 28년 뒤인 1835년에는 6,615,407명으로 거의 100만 명 정도가 줄었다. 28년 동안 거의 100만에 가까운 인구 감소는 주로 역병과 기근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인구 감소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조선 후기 주된 역병으로는 콜레라, 두창, 성홍열, 장티푸스, 이질, 홍역 등이 있었는데 이중 가장 피해가 컸던 것은 콜레라와 두창이었다.

역병 유행으로 인한 두려움, 생활기반인 마을을 떠나야 하는 고생, 피난지에서의 고통스런 생활, 병력에 따라 경련, 토사, 한기와 열악한 환경의 구호, 가족을 잃은 슬픔 등 그 끔찍함을 1895년 콜레라 유행을 지켜 본 어떤 외국인의 기록으로 생지옥 같은 처참함을 읽을 수 있다. 이와 같은 고통을 역병이 한 번 돌 때마다 몇 만, 몇 십만 명이 겪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부모, 형제 자손이 죽어가는 고통을 공유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마을 주변의 언덕은 새 무덤들로 가득 찼고 장례 행렬은 줄줄이 계속되었다.

조선후기 사회에서 역병이 크게 돌게 된 까닭은 여러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우선 국제적 측면에서 이 시기 국제 교역의 확대를 들 수 있다. 질병사 연구에 따르면 18-19세기 전염병은 거의 전 세계에서 발생했다고 하는데 동쪽에 위치한 조그만 나라인 조선 역시 이 세계 역병 유행의 한 부분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두창(천연두)이나 콜레라 등은 모두 중국에서 들어왔다. 둘째로 사회변동도 역병이 크게 도는 원인을 제공했다. 당시 농촌사회의 분해와 도시의 성장에 따른 인구의 밀집 등은 전염병이 유행하기에 좋은 조건을 조성하였다. 지역사회의 교류와 인구의 밀집으로 인해 악화된 환경은 전염병 병균의 좋은 서식처 노릇을 했다. 셋째로 문화 관습적 측면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당시 조선 사람들은 목욕을 자주하지 않았으며, 채소를 그냥 날것으로 먹기를 즐겼고, 우물 가까운 곳에 뒷간이 위치한 경우도 많았다. 게다가 장례식 때에는 일가가 모두 모여 음식을 나눠 먹었다. 이와 같은 장례 풍습은 지역 단위로 역병이 유행하는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당시에는 전염병을 피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도망이었다. 전염원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이다. 역병 유행이 심한 경우에는 주민의 90%이상이 다른 지역으로 보따리를 꾸려 성안이 텅텅 비게 되었고 관공서의 업무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도망이 상책이었다는 것은 당시의 의학수준이나 구료 대책이 근본적으로 전염병에 무력했기 때문이었다.

1821년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의약의 효과가 없고, 옛 처방이 전혀 없다. 의원조차 어떤 증세인지도 모른다.”라는 기록이 이를 잘 말해준다. 재앙을 벗어나기 위해 피난이 최선의 방법이기는 했지만 자신의 생활 터전을 버리고 산간벽촌에서 살다 돌아오는 방법은 굶어죽는 모험이 있었다.

서울에서는 역병이 돌면 한성부에서 환자나 주검을 적발하여 성 밖으로 격리시키는 조치를 취하였고 혜민서(조선시대 의약과 일반서민에 대한 치료를 맡아보던 관청)나 성문 밖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동서활인서(조선시대 서울의 병자를 무료로 치료해 주던 의료기구, 고려시대 초기에 있던 동서 대비원과 혜민국의 제도를 계승한 것)에서는 역병으로 생긴 굶주린 사람을 보살피는 임무를 맡았고, 삼군문(조선시대 3군영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에서는 장막을 치고, 진휼청(흉년에 곤궁한 백성을 도와주는 기관)에서는 양식을 지급하였다. 그런데 역병이 크게 들수록 구호대상자가 많아 정부에서 줄 수 있는 곡식도 한계가 있어서 동서활인서를 비롯한 여러 구료소에 있던 굶주린 백성들의 생존경쟁이 치열하였으며, 모여든 난민들은 죽 한 그릇 얻어먹기에 필사적이었고 그들은 길바닥에서 밤을 새우다 병에 걸려 죽는 자가 속출하였다니 지금은 생각할 수 없는 어려운 사회적 현실이었다. 조선후기에는 이런 구료기관마저 유명무실하게 되었고 병을 일으키는 본질과 원인에 대해 오늘날과 같은 과학적인 인식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종교적으로 이해되기도 하여 역병은 역신이 붙은 것으로 생각 귀신을 겁주어 쫓아내는 방법 “측귀”와 살살 달래서 풀어주는 방법(굿)이 더 뛰어난 신령의 도움을 받아 역귀로부터 벗어나는 방법 등으로 이해 역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지금 전 세계가 공포와 삶의 방식과 일상의 행동마저 바꾸는 전염병시대가 도래하면서 조선시대 사람들은 역병이나 난을 피하고 살기에 좋은 곳이 어디인지를 찾고자 하였던 것 같다. 이중환의 ‘택리지’가 그 시대 베스트셀러(Best Seller)가 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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