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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로 춘향영정을 제작해 춘향사당에 봉안하고, 매년 제사를 지내며 이를 지켜온 ‘의기 최봉선’, 남원시민들은 그녀를 아십니까?특집/ 춘향영정, 그리고 최봉선

 

남원뉴스는 지난 3월 8일 오전 여성의 날 행사장에서 펼쳐졌던 '춘향영정 수난사' 내용을 공유해 춘향영정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끝까지 최초의 춘향영정을 지키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의기 최봉선을 재조명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글쓴이는 이 글이 확실한 자료와 정확한 사실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임을 알렸다. <편집자 주>

 

△춘향영정 수난사

/자료조사: 남원역사연구회, 글: 남원역사연구회 김양오

 

1. 일제강점기 기생조합 ‘남원 예기’의 으뜸기생이었던 최봉선은 1929년 기생을 그만 두고 기생조합(권번)을 나옵니다. 그 뒤 전국의 권번을 돌아다니며 돈을 모읍니다. 무슨 돈일까요? 춘향 사당을 짓고 춘향영정을 봉안하여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였습니다. 추석이나 설 같은 명절도 못 지내고 우리 문화는 모두 다 사라져가던 엄혹한 시절에, 일본의 신사도 아니고 사당을 짓고 전통방식의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엄청난 항일 문화운동이었습니다. 1919년 만세운동으로 모든 활동이 철저히 감시당하는 상황에서 기생들이 이런 일을 했다는 것은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1,200원의 성금 중에 최봉선 본인이 낸 돈만 200원이나 됐습니다. 쌀 한가마니가 7원이던 시대 200원이면 정말 어마어마한 돈이었습니다. 그럼, 여기서 궁금한 것? 최봉선은 왜 그런 일을 했을까요? 전라북도 권번을 연구한 2010년 전북대 박사학위 논문에는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남원권번은 예절교육과 묵화, 서도 등을 교육하였고 춘향제와 같은 주체성이 강한 행사와 민족의식 고취의 발로로 일본어 교육을 받지 않았다.”

남원 권번에서만 일본말을 안 가르쳤다고! 아니, 일제강점기 때 일본놈들 상대로 장사를 해야 먹고 살 수 있었을 텐데 일본말을 안 가르쳤다고요? 그 한 문장이 남원권번 기생들의 항일의식을 분명히 말해 줍니다. 그 때 수기생, 으뜸기생이 누구였을까요? 네! 바로 최봉선입니다.

 

1931년 최봉선과 기생들의 열정에 당시 남원의 시민운동가였던 이현순과 권번 선생이었던 이백삼 같은 분들이 도움을 줍니다. 드디어 춘향 사당을 짓고 춘향영정을 봉안합니다. 그 영정은 진주 권번의 회화선생이었던 것으로 짐작하는 강주수라는 분이 그렸습니다. 쪽진 머리를 하고 손가락엔 옥지환을 낀 30대 어사 부인으로서 소박하지만 당당하고 아름다운 우리네 여인상이었습니다.

 

 2. 최봉선과 기생들이 제관이 되어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제사를 이어 온 춘향제. 아마 유교식 제사에서 여자들이 제관이 되는 제사는 춘향제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축제가 바로 춘향제라는 사실은 다 아시죠? 그렇게 어렵게 제향을 이어 오던 1938년 말, 우형 임경수라는 사람이 날림으로 춘향그림을 그려 본래 영정을 몰아내고 사당에 올립니다.

3. 식산은행을 아시나요? 지금 새마을금고 본점이 있는 그 자리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의 식산은행이 있었던 곳입니다. 우리 선조들의 돈을 닥닥 긁어서 일본으로 보내는 은행이었죠. 그 식산은행장 일본인 하야시 시게조가 춘향사당을 방문합니다. 그는 일본 동경에서 대히트를 친 가부끼 형식의 공연 ‘일본 춘향 하루카’를 보고 무척 감동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친일화가 김은호에게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 춘향 그림을 주려 주시오.”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얼마 뒤 하야시 시게조, 김은호, 호남은행장 현준호가 춘향 그림을 그리기 위해 춘향사당을 방문합니다.

그 때 사당에는 임경수가 날림으로 그린 춘향 영정이 봉안되어 있었죠.

“너무 저속하고 조잡하군. 페인트로 쓱쓱 그렸어! 다시 그려야 겠소.”

그 때 호남은행장 현준호가 돈을 많이 대고 지역의 친일파들이 돈을 모아 줍니다.

1939년 김은호가 일본 공연에 등장하는 젊고 이쁜 춘향이를 그려 보냅니다. 그림 기법도 완전 일본 회화 기법의 탁한 채색법, 바로 그것이었죠. 그런데 더 분노할 일은 춘향그림을 수레에 실은 뒤 양쪽에 긴 끈을 매달고 권번 기생들이 그 뒤를 따르게 합니다. 권번 기생들은 치욕을 감내하며 식산은행부터 광한루 사당까지 행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행사는 일본에서 신사에 신을 올리는 입혼식 이었습니다. 그런 입혼식을 거쳐 강주수가 그린 조선의 춘향 영정과 김은호가 그린 일본의 춘향 영정을 나란히 세워 놓습니다. 그건 바로 내선일체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4. 아, 드디어 1945년 해방이 됐건만 사람들은 친일화가 김은호가 그린 춘향영정을 내리지 않습니다. 해방이 되었어도 친일파들은 속죄하지 않았고 여전히 권력을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납니다. 광한루원에도 인민군이 진을 치고 몇 달을 살았습니다. 최봉선은 오밤중에 자신이 제작한 춘향 영정만 머리에 이고 주천면으로 피난을 갑니다. 전쟁 통에 김은호가 그린 영정은 누군가 칼침을 놓아 크게 훼손되어 사라졌습니다. 북한군이 남원에서 철수하자 최봉선은 피난살이를 끝내고 돌아와 춘향영정을 사당에 다시 봉안하고 제향을 지냈습니다.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제사를 지냈고 동지에는 팥죽을 쑤어 올리며 지극정성을 다했습니다.

5. 1959년 초, 이상선이라는 사람이 친일화가 김은호의 일본 춘향그림을 본따서 조잡하게 춘향 그림을 그립니다. 그리고 그것을 춘향사당에 몰래 봉안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알게 된 주민들의 반대로 바로 철거됩니다. 그리고 1960년 10월 3일 친일화가 김은호는 한국전쟁 중에 훼손되고 사라진 춘향그림과 똑같이 영정을 다시 그려 봉안하려 합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지역주민들의 반대로 무산됩니다.

6. 1961년 군사 쿠데타와 함께 박정희 정권의 내각수반이 된 송요찬이 김은호가 그린 춘향그림을 사당에 봉안합니다. 일본놈들이 했던 방식 그대로 최초의 춘향영정과 나란히 봉안합니다. 그렇다면 서울 청와대에서 박정희 옆에나 있어야 할 송요찬이 왜 남원 춘향이까지 신경을 썼을까요? 송요찬은 지리산의 빨치산을 토벌하러 6.25 때 남원에 오래 머물렀던 빨치산 토벌 대장이었습니다. 그 때 춘향영정을 봤던 것이죠.

7. 1962년 내각수반 송요찬이 다시 남원에 옵니다. 춘향이를 너무 좋아하나 봅니다. 그 때 송요찬은 두 가지 춘향영정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외국 관광객을 위해서 이쁜 춘향영정으로 봉안해야 한다.”

그러면서 강주수가 그린 최초의 춘향영정을 사당에서 철거해 뒷방에 처박아 놓습니다.

1931년부터 1962년까지 32년 동안 춘향사당에 봉안되었던 최초의 영정이 일본놈도 아니고 한국 사람에 의해 뒷방으로 쫓겨난 것입니다. 권력자의 힘에 눌려 자신이 제작한 영정을 빼앗겼지만 최봉선은 눈물을 머금고 춘향제향의 제관으로 계속 활동합니다.

 

8. 1965년 동아일보에서 최봉선은 김은호가 그린 관제춘향을 몰아내고 최초의 영정을 춘향사당에 언젠가는 기필코 모시겠다고 관에 선전포고를 합니다. 그리고 1967년 신문 보도 이후 최봉선은 역사 속에서 사라집니다.

9. 2020년 여름, 남원 시민들의 요구로 친일화가 김은호가 그린 춘향영정이 드디어 사당에서 내려집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이지 당연히 제자리로 모셔야 할 최

초의 영정은 아직도 박물관 수장고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10. 2021년 1월 남원역사연구회는 최봉선의 본명은 최순남이고 1974년에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운영했던 부산관이 제일은행 사거리에 있는 중앙종로약국 자리라는 것을 찾아냈습니다. 하지만 그 분이 1967년 이후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디서 어떻게 돌아가셨으며 무덤은 어디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광한루를 설명하는 리플렛과 시청 홈페이지에도 최봉선 이라는 이름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춘향제로 먹고 살았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남원, 전국에 아니 세계에 춘향이가 알려지고 남원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것은 바로 춘향제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최봉선은 남원의 은인입니다. 그런데 최봉선은 남원의 역사 속에서 철저히 잊혀 졌습니다.

이제 다시 최봉선을 부활시켜야 합니다. 그분이 제작한 영정을 제자리에 봉안하고 제사를 지낼 때 최봉선의 영혼은 제대로 위로 받을 것이며, 그제 서야 남원에는 진짜 춘향정신이 살아날 것입니다.

 

<참고 자료>

-1920년대-1960년대 조선일보, 동아일보

-친일인명사전, 김은호 춘향영정 회고록

-제9회 남원 춘향제 참별기(이태준과 함께 온 학예사 최옥희 씀)

-남원 종가와 춘향사당 건립자 탐방, 서정섭

-<전라북도 권번의 운영과 기생의 활동을 통한 식민지 근대성 연구>, 황미연, 2010, 전북대 역사학 박사학위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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