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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시 송동면 영동리 잿말로 가는 길 좌측 나지막한 언덕 사이로 건물 한 채가 있다. 바로 손동마을 뒤편에 속한다. 작은 동산의 허리를 휘돌아 동쪽으로 단아 한 문을 밀치고 들어서면 소박한 멋과 기품이 느껴지는 4칸 규모의 최락당(㝡樂堂)과 마주 선다.
마치 남쪽 햇살을 모두 받으려는 듯 빗살문 창호에 3칸의 대청과 한 칸의 방으로 구성된 전통기와 건물로 기둥과 문고리 장식에서 묻어나는 시간의 흐름은 예사롭지 않다.
그런데 최락당이란 당호는 보이지 않고 건물 중앙에 백졸헌(百拙軒)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본래 이 건물은 사람은 조선 중종 때 두문 72현의 한 사람인 수은공 김충한의 5세손 별제공 김익기가 지은 집이다. 그 후 그의 아들 김유가 중수하고 들에 숨어있는 집이란 뜻의 야은당(野隱堂), 두 그루의 나무를 뜻하는 쌍백당(雙栢堂)이라는 당호를 걸고 생활하였다.
쌍백당이라는 당호를 보아 짐작하건대 취락당 후원 어디엔가 측백 또는 잣나무를 심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이후 김익기의 증손인 김선이 성균관 장의를 사임하고 내려와 이곳에 은거하자 여러 사람이 벼슬을 권유하였지만 부모 봉양을 핑계로 출사 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살았는데 그의 호가 ‘최락당’ 또는 ‘백졸’이다. 그래서 ‘백졸헌’이라는 현판을 걸었는데 이 또한 꾸밈없이 담백한 맛이 느껴진다.
최락당 후원에 한 그루의 은행나무가 오랜 세월 풍파를 견뎌온 상처를 메워가며 최락당의 벗으로 400여 년을 지켜오고 있다. 김선이 성균관 장의를 사임하고 내려올 때 성균관 명륜당 앞뜰에 은행나무를 꺾어다가 심었다고 하는데 아마 씨앗이 떨어져 뿌리내린 어린 묘목을 가져다 심은 것으로 생각된다.
최락당의 빗살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서면 탁 트인 마루와 기둥 사이에 신흠, 권필, 천차로, 장경세 등 조선 중기의 문인들이 남기 한시가 빼곡하게 걸려있다.
눈을 돌려 천장을 바라보면 보와 보 사이 천장을 꽉 채운 최락당이라는 당호가 양각되어 있는데 김선의 손자인 김습이 16세에 쓴 글씨로 굵고 힘이 넘치는 필체가 압도적이다. 처음 이곳을 가는 사람들에게 최락당은 숨은 보물 찾기와도 같다.
조선시대 향촌사회의 교육을 가르치는 역할과 향약계의 모임 장소였던 최락당. 정철의 문인으로 벼슬을 마다하고 야인으로 살며 명필로 이름을 떨친 시인 권필의 편액에 담긴 시구절에 “번잡한 속세 인연 모두 털어버리고 자연 속에 은거할 좋은 터를 잡았네.”라고 읊었다.
9월 중순 가을이 깊어가고 들판은 풍요롭다. 아침, 잔잔하게 피어오르는 요천 들녘에 피어난 물안개가 대숲사이로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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