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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지<11회> 38선을 넘어 남쪽 고향땅으로아침을 여는 창/ 수필가 서호련

 

 

 

 

 

 

*38선

38선을 넘는다는 것이 그리 짧은 거리는 아니었다. 길도 모르고 지형도 잘 모르지만 북두칠성을 보면서 남쪽으로 방향을 잡고는 무작정 걷다보니 38선을 넘어 2월 5일 아침 우리는 어느 남쪽마을에 들어선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제는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우리는 3 년간이나 조국을 떠나 소련 땅에서 강제노역을 하다 보니 당시 남과 북의 대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38선에서 가까운 마을에서는 북에서 내려오는 남파간첩을 보면 즉시 신고하는 반공교육이 잘 되어 있었다. 금방 소문이 돌았는지 두 사람이 몽둥이를 들고 우리 쪽으로 오고 있었다.

 

우리는 소련 배를 타고 1월 22일 함흥 항에 도착하였고 북조선 중앙관원들은 소련장교로부터 우리를 인수하여 흥남여자중학교에 수용시켰다.

며칠이 지나자 관원의 안내로 모두 흥남비료공장을 보러갔다. 비료 포대가 계속 나오는 것을 보았다. 아마도 북한의 발달된 산업현장을 보게 함으로서 북조선에 남게 하려는 의도인 것 같았다. 북조선의 여성동맹원들은 친절하고 지극한 정성은 잊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2월에 접어들자 북조선 당국은 남한출신 540명을 보내기 위해 힘을 쓰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38선을 넘는 일로 고심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양단된 남과 북은 이념이 달라 그간 서로 간에 대화도 없고 비방만 하며 왕래를 하지 않고 있었으니, 포로 송환 문제가 난항을 겪는 모양이었다. 이때에 북조선 당국자의 말은 합법적으로 갈 수 있는 절차가 없다면서, 전원이 한꺼번에 간다는 것은 위험스럽고 작은 조로 나누어 보내주는 것이 좋겠다며, 2월 1일 저녁부터 약 70명씩을 보안대원의 인솔 하에 38선까지만 인도를 해주고, 그 다음부터는 각자가 알아서 가라는 것이었다.

나는 2월 4일 3차 그룹에 소속되었다. 선발대의 소식은 전혀 들을 수가 없었고 전북출신 19명으로 구성된 3차 그룹은 모두 76명이었다. 보안대원의 안내를 받으며 임진강까지는 왔다. 여기에서 보안대원은 되돌아갔다. 어두운 밤 극도의 긴장 속에서 38선을 넘게 되었다. 우리들 전북출신 57명은 따로 어둠속에서 걸음을 재촉하며 산길 들길을 해치며 남쪽으로 향했다. 38선을 너머 어느 남쪽마을에 들어서자 두 사람이 몽둥이를 들고 쫓아왔다.

그들은 서북청년단 소속이었는데 우리들의 설명을 듣더니 안내를 받고 싶으면 우선 파주 정송지서까지 가자고 하는 것이었다. 두 청년을 따라 정송지서에 도착하니 무려 3백여 명의 경찰들이 총 끝에 검을 꽂고 우리 주위를 포위하였고, 우리를 남파간첩이나, 인민군, 보안대원, 중국 팔로군 등이 아닌가 하며 별의별 질문을 다 하면서 우리를 한참 두들겨 패고 난 뒤 전원 파주경찰서로 이송하였다. 두 대의 트럭에 나누어 타고 파주경찰서 연병장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우리가 북에서 내려온 포로들이라고는 하지만 소련에서 오는 포로들이라 공산주의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우리들에게 총부리를 대고 있었다.

오후 8시가 되자, 이제는 한 사람씩 고문실로 데려가 넓적다리 안에다 장작을 넣고 허벅지 밟기와 코에 물 붓기, 팔을 뒤로 포승지어 앉히며 의자 빼내기, 전기고문까지 우리 모두는 반죽음이 되도록 얻어맞았다. 조국이라고 찾아왔는데 반기는 것은 모진 고문과 폭행이었다. 조선시대 당파싸움을 하면서 걸핏하면 역적으로 몰아 참혹한 고문으로 허위자백을 받아내던 모습, 일제 강점기에 조국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던 애국지사들을 친일 주구배 고등경찰들이 가혹한 고문을 하며 허위자백을 받아내던 모습이 그대로 눈앞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조국의 경찰들이 우리를 안전하게 고향으로 데려다 줄 생각은 않고 개 패듯 폭행하는 모습을 보면서, 과연 조국이란 무엇인가, 민족이란 무엇인가, 동포란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천 포로 수용소에 입소

2월 8일 오후가 되자 이동명령이 떨어졌다. “너희들은 모두 인천으로 간다.” 한 나절을 달려 도착한 곳은 인천 임시 포로 수용소였다. 이곳에 수용된 인원은 490명 이었다. 이때부터 국내의 시국강연을 들었다. 아마도 중국, 소련 북한을 거쳐 왔으니 공산주의 이념 교육을 받았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남한 민주사회에 적응시키기 위한 이념 강연을 하는 것 같았다. 며칠이 지나자 이상스럽게도 야단법석이었다. 당시에 국무총리였던 이범석(1900-1972) 장군이 이곳을 방문한다는 것이다. 이범석장군이 어떤 사람인가.

( 황의지의 자서전, 장군의 후예 2-192 참조.재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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