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남원에 사는가?
한병옥
모든 생명에게는 모태의 선택권이 없습니다.
이는 곧바로 삶의 터전에 대한 선택권이 없다는 말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풀과 나무로 선택받은 생명은 태어난 자리에서 단 한치도 옮기지 않고 천년 수명도 다 해야 합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좀 가혹한 원죄로 보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푸른 창공을 비상하는 새라 해서 완전히 다르지 않습니다.
알에서 깨어난 지점에서 2km를 벗어나기 어려운 여건에서 사는 것이 일반적이고 수천 km를 이동하는 철새들도 선조 선배들의 항로를 이탈하는 경우가 별로 없고 보면, 모든 삶의 터전에는 일정한 궤도가 정해져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궤도를 이탈하려 몸부림치는 동물이 있습니다. 인간이지요.
호기심이 엄청 강합니다. 가야 할 이유가 없는데도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옮겨 다니기를 즐깁니다. 다른 짐승들 모양 일정한 거처를 두고 오간 경우가 많으나 아예 가족을 모두 이끌고 삶의 거처를 옮겨버리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습니다.
가까운 이웃 고을 정도가 아니라 아예 아메리카나 유럽으로 옮겨 가 버리기도 하는, 지구의 어느 구석으로도 옮겨 다니는 능력을 확보해 놓고, 이제는 자기들이 더럽히고 오염시킨 지구는 싫다고 아예 달나라도 벗어나 행성으로 날아가 버릴 연구까지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보면 인간은 한 자리에 고착되는 것을 지극히 싫어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시집도 '가고' 장가도 '가면서' 거주 이전을 제도화 해 놓기도 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정도는 개인이나 가족 단위의 이동에 그칩니다.
대규모 이동이 생기는 경우가 있는데 씨족이나 부족이 집단 이동을 하는 경우지요.
이는 규모가 클 뿐만 아니라 이동의 거리도 장거리인 경우가 많겠습니다.
이 집단이동은 좋은 기온, 좋은 토질, 좋은 교통 등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이는 명목상의 경우이겠고, 대체로는 패거리 다툼에서 밀려난 집단이 함께 이주하는 경우일 것입니다.
알타이어계에 속하는 우리 한(韓)민족은 바이칼 호수 서쪽이 그 시원이라 하는데 어떤 경우에 처하여 몽골, 만주를 거쳐 한반도에 정착하게 되었을까요?
천부지지(天府之地)에 주어진 타의(他意)
남원인에 대해 얘기해 보고자 합니다.
한반도에 사는 모든 사람을 백성(百姓)이라 하지요? 여러 성씨가 모여 산다는 뜻이겠습니다.
그 많은 성씨에는 또 본관이라는 것이 있지요? 여러 지방 사람들이 여기저기에 옮겨 살다가 어느 지역에 멈추어 살고 있는 것이 지금의 삶의 터전이 됐을 것입니다.
우개-우물 안 개구리의 준말, 필자가 필자를 가리키는 말-의 경우 시조 할아버지께서 거점(주거지)을 확보하신 곳이 청주여서 청주 한씨입니다. 그런데 본인은 지금 남원에 살고 있습니다. 어느 성씨든지 대체로 그럴 것입니다. 시집, 장가를 가서 주거지가 변했든지, 난을 피해 어느 지방으로 긴급 이주해 정착하게 되어버렸다든지. 그렇게 옮겨 다녔지 500년 1,000년을 그 지방 그 곳에서 살아왔다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단 외부에서 떠돌다가 원적지로 돌아가 정착한 경우는 있겠지요.
우리 남원에는 다양한 성씨와 본관이 각기 다른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살고 있는데 언제 어떤 연고로 하여 지금 이 고장 남원에 살고 있는가를 추적해 본다는 것은 낮잠 자는 일보다 흥미롭고 재미있는 일일 수 있겠습니다. 반대로 남원에서 살다가 떠나버린 사람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문제는 남원에서 살든, 떠났든 간에 그것이 자의냐 타의냐에 있습니다. 줄여 말하자면 현재의 남원인은 남원에 살고 싶어서 사느냐 어쩔 수 없이 사느냐 혹은 자의 반 타의 반에 사느냐 그 선상의 어느 지점에 내가 있느냐 하는 것이겠습니다.
우개의 경우 선천적으로 주어진 조건으로 남원 사람이 되었고, 그 남원에 거부 반응이 없었으며 그 거점에 만족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그런데도 남원 사람으로서의 자존이 형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느 잘난 사람은 잘 난대로 못난 사람은 못 난대로 떠났습니다. 무수히 떠났습니다.
그런데 나는 왜 여기 남원에 붙박여 풀이 죽어서 살고 있는가? 나는 못난 솔이 선산 지키는 그런 정도에 지나지 않는 사람인가?
그런데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의지로 남원을 선택하여 들어와 삶의 터전을 꾸리기도 합니다. 무엇 때문일까?
우개는 자문해야 했습니다. 선천적 피상적 타의가 아닌 능동적이고 자의적인 이유, 그 무엇인가가 있는가?
자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남원을 떠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남원인으로 남고 싶었고 남원인 으로 삶을 마감하고 싶었습니다.
남원은 천부적인 면에서 어느 지방에서도 비교하기 어려운 강점을 고스란히 모아놓은 고장입니다. 삼신산 중의 하나이면서 천하명산인 지리산 쪽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드넓은 평야가 펼쳐진 천부지지 옥야백리라는 명당이 남원입니다.
바다가 펼쳐져 있지 않은 아쉬움이 있습니다만 그 바다의 자리에 평야가 자리한 고장입니다.
지리산 정기가 빚어낸 맑은 물과 빼어난 인물들은 남원인 들의 자존심과 자긍심을 만족시킬 수 있을 만한 문화와 예술을 창출해냈습니다.
그 중에서도 세계의 소리 중에서 빼어난 민족의 소리 판소리를 창출해냈고 남원이 없으면 우리의 고대 소설은 없다 할 만큼 고대 소설의 본향이 남원입니다.
그 소설들의 배경이 남원이라는 그 자체가 그만큼 빼어난 고장이라는 것이며 그 판소리와 소설에 쓰인 언어가 남원 말인 것은 그 작가가 남원 사람임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지은이를 모른다는 것이 흠일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함께 만들어냈다는 것이 자랑스러운 것이지요. 전국을 다 뒤져도 이만한 고장을 찾아낼 수 있을까요?
그런데도 우개는 양이 차지 않습니다. 그것은 남원이라는 지역에 주어진 조건들로서 타인들에게 내세울 수 있는 자랑거리일 뿐, 우리가 남원인 이고 싶다는 조건을 충족시켜 주지 못했습니다.
한 쪽이 허전하고 허기진 느낌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욕심이 과했다 해야 할까요?
이 배고픈 과정에서 몇 가지 일화를 겪게 됩니다. 하도 여러 번 얘길 해서 귀가 아프실 분도 많겠지만 한 번 더 읊어야겠습니다.
역사에 대한 허기(虛錡)
첫 번째 일화.
큰 애가 중학생일 때 함께 선원사 앞을 지나고 있는데 승용차(그 때는 승용차가 드물었다)가 서더니 아들에게 어데 가 볼만한 데가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느닷없는 질문에 아들이 머뭇거려 내가 나섰습니다. 관광지를 가려느냐 유적지를 찾는 것이냐? 대답은 아무데나 였습니다.
오히려 제가 당황했습니다. 임기응변으로 육모정을 안내해 주었는데 그 자리에서 안내해 주기가 가장 쉬워서 였겠지만 이건 아니다 싶었습니다. 우문우답이었습니다.
차가 떠난 뒤 혼자 자책이 심했습니다.
기본이 확립돼있지 않았다는 생각과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이런 물음을 받았을 때의 대비에 대한 교육은 고사하고 나 스스로 이 모양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내 아들이 이 정도라면 다른 학생들의 수준은 또 어느 정도일까 하는 생각 또한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두 번째 일화.
35년 전의 전후에는 한가롭게 산에 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혼자 다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아침에 도시락이나 대용 식품으로 출발해 저녁 무렵 돌아오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습니다. 자연히 남원 시가지를 중심으로 코스를 정하는 것이어서 남원의 산을 타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능선을 따라 걷다 보면 풍화작용에 의해 쏟아져 내린 너덜겅 같은 지대를 거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냥 그러고 다녔습니다. 이 지대가 백두대간 능선이었는데 그 때는 백두대간이라는 말을 들어 본 경우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뒤에 알고 보니 그 능선이 백제와 신라의 국경이었고 백두대간이었으며, 그 국경 능선에 가야나 신라가 성을 쌓았고, 그 성이 무너져 내린 돌을 풍화작용이 만든 너덜겅으로 짐작하고 넘어가버린 것이었습니다. 사실을 알았을 대의 참담함은 첫 번째 일화에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소위 남원의 토백이-'본토박이'의 남원 사투리-가, 소위 선생을 한다는 놈이 신라, 백제의 국경 능선도, 그 국경에 쌓은 성도, 제가 밟고 다닌 그 돌 들이 성돌인 줄도 모르고 풍화작용의 너덜겅으로 알고 의심조차 해 보지 않았다니! 대단한 충격이었습니다.
세 번 째 일화.
두 번 째 일화와 연결된 경우지만 국어 선생이나 잘 할 일인데 뭐한다고 신채호 선생의 『조선 상고사』 문고판을 어쩌다 구입하여 읽게 됐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남원의 아막산성이 나오고 이 산성에서 일어난 사건들 얘기가 전개 돼 있었습니다. 신채호 선생은 단언하지만 남원에 발을 디뎌 본 일이 없을 것입니다.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며 쓴 책 속에 그 분은 남원의 역사 얘기를 하고 있는데 남원 토백이 나는? 그 때까지 나는 남원에 성이 있다는 것도 몰랐고, 아막산성 이라는 이름조차 처음 만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의 능력과 취향에 따라 아는 것, 관심을 갖는 분야가 각기 다를 수밖에 없겠지만 수 십 년 전의 중국에서의 독립운동가에게 남원의 삼국시대를 배워 알아야 한다는 것은 숨어버리고 싶을 만큼 큰 충격이었습니다.
네 번 째 일화.
이제 남원에 대해서 뭔가 조금 눈 떠 가고 있다 할 때 쯤,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읽고 있었습니다. 대하소설 속에 지리산 빨치산 토벌 작전 얘기가 나오고 그 과정에서 토벌군의 남원군 주천면 고기리 학살 사건이 나왔습니다.
전라남도 조계산의 선암사 산사 사람 조정래는 남원의 양민 학살 사건을 취재해 작품 속에 녹여 넣고 있는데, 남원 사람 나는? 더구나 내 고향 주천면 고기리라니? 또 겪어야 하는 충격이었습니다. 뒤에서야 알았지만 조정래 작가와 나는 동갑내기였습니다. 참담한 일이었습니다.
극복할 수 없는 격차를 수긍해야 한다면서 내가 더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있지 않겠는가? 하는 데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존감을 세우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1980년대 때, 우개가 40 중반 전후에 겪었던 일들인데 이 일련의 사안들이 우개를 바꾸었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스스로 부끄러운 줄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고향 땅에서 살면서 고향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길 안내조차 하기 어려운 내가 소위 '남원인'이라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책이었습니다. 아이를 키우고 기르는 부모의 입장에서 이래도 되는가 하는 자성과 질책이었습니다,
더구나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의 입장에서 이럴 수는 없다는 자책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앎(知)에도 선후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백두산 보다 지리산을 먼저 아는 것이 옳고, 경희루 보다 광한루를 먼저 알아야 하며 박종철 보다 김주열을, 프랑스 혁명 보다 동학농민혁명을 먼저 알아야 한다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나 자신의 삶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전공이 바뀌어버린 것입니다. 역사에 대한 빈곤 허기에 시달렸던 것입니다.
역사의 해석과 발굴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어떻게 향토에 대한 애착이나 자긍심이 일어날 수 있겠느냐는 자각이 눈을 떴습니다.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도 마음의 눈으로 보고 느껴야 드러나는 법입니다. 하물며 향토에 얽히고 묻혀있는 문화와 역사를 캐내고 발굴하고 배우면서 깨달으려는 열정 없이 그것을 알 턱이 없겠고 모르면서 사랑으로 다가갈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다가가 보려 했습니다.
그러면서 알아야 할 것도 선별해야 할 필요가 있고 단계가 있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정유년 남원성 전투가 1597년 8월 12일 부터 시작해 16일 패전으로 끝났으며, 군관민 1만여 명이 왜적에 의해 몰살당했다는 것을 아는 것은 그냥 피상적인 상식일 뿐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패인이 무엇인가 이며,
다시는 그런 처참한 패전을 당하지 않기 위해 무엇을 어찌해야 했는가에 있습니다. 그런데 패배의 원인을 규명하지 않았습니다.
재조지은(再造之恩)만 외쳤습니다. 그러니 다음의 대책을 마련할 수 없었고 당연히 그 꼴 이상의 참담한 치욕을 되풀이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역사를 배우는 것도 공부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수박을 놓고 이것이 수박이라는 것을 알고 넘어가는 것이지요.
먹어 맛보고 영양화 시켜 건강을 향상하고 씨를 가려내 내년의 경작에 대비하자 해야 하는데 그러지를 않았다는 것입니다.
김주열 열사가 1944년생이고 금지면 출신인데 만 17세가 아니라 16세에 마산에서 최루탄 맞고 죽었다는 것은 몰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김주열이 그렇게 희생되지 않았으면 우리 역사에 4.19 민주 혁명이 있을 수 없었고, 일제 부역자들의 자유당 독재 정권이 대를 이어 이 땅을 지배했을 것, 역사 바로 세우기가 몇 십 년 물러났을지 모른다는 것, 김주열 열사가 아니었으면 이 땅에 두 곳의 국립 민주 묘역이 있을 수 없다는 것, 그 민주 묘역을 만든 사람이 김주열 열사라는 것, 그래서 자신의 무덤을 세 곳에 만들면서 열여섯 살 따리가 뭘 알아서가 아니라 열사는 죽어서 이룩해낸 업적이 열사의 위상이라는 것, 그런 열사를 배출해낸 고장이 우리 고장 남원인 이라는 것을 알고 깨달아야 김주열을 안다 할 수 있고 스스로 남원인임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가 우러나는 남원인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 왔습니다.
허구의 역사도 자랑거리가 됩니다.
춘향이의 고장, 흥부의 고장이 대표적인 경우이겠는데 그 스토리가 좋아서 그렇게 되었겠습니다만, 그 보다는 그 얘기를 엮어낸 분이 우리 고장 남원인 이기 때문일 것이며 함께 더불어 만들고 이어왔다는 것이 더 값진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실존과 허구는 구분해야 합니다. 허구의 인물이 실존의 인물을 능가하는 세상은 분명히 어딘가 무언가가 잘못된 것 아닌가를 숙고해 봐야 할 것입니다.
돌아보면 재미있었던 일들도 많았습니다. 우선은 향토를 보는 시점을 바꾸어야 했습니다. 거창하게 역사 속으로 뛰어드는 것 보다 자연을 보기로 했습니다.
산을 보고 물을 보았습니다. 1만 년 전에 저 능선은? 5천 년 전에 저 물은?
하는 식이었습니다. 바꾸어도 보았습니다. 5백 년 전에는? 1천 년 전에는? 5천 년 전에 어떤 사람이 어떻게 어데서 살았을까?
그러면서 맑고 푸른 물결 속에 잠겨서 출렁거리며 평탄 작업을 하고 있는 호수가 보였고 물이 빠져나가면서 습지에서 조개를 줍는 사람도 보이고 반지하의 어설픈 살림집이 들어서고, 씨앗을 뿌리고 그래서 고룡(古龍)이라는 지명이 생겨났구나 싶었고 거기에 성을 만드니 용성(龍城)이라는 별칭이 생겼겠다 싶었습니다.
너덜겅인 줄 알았던 성들이 신라성이라면 반드시 백제성이 있어야 할 것인데 도대체 어디에? 산봉우리 봉우리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오르고 또 올랐으나, 헛탕을 치고 내려와 생두부에 들이킨 얼음이 서걱거리는 막걸리......그러다 언젠가 부터는 백두대간이 삼팔선, 휴전선으로 보이기 시작했으며 권력자들의 끝없는 욕심과 잔학한 횡포와 서슬에 희생되어가는 무고한 백성들의 삶과 희생과 피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단순한 남원이 아니라 이 나라와 세계의 각축이 얽혀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왜구가, 왜적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위정자들이 어찌하였기에 나라를 이 꼴로 만들어 일개 해적의 무리에 국가의 기틀이 흔들리게 나라를 운영하였는가?
그만큼 당했으면 되었지 또 그 무리들에게 사직을 걸게 만드는가? 반도 전체가 찍히고 베이고 피범벅이 되었으며 약탈당하고 강간당하고 불타서 농사지을 사람도 없이 황폐화 되게 할 수 있는가? 놀라운 것은 그 이유도 밝히지 않고 재조지은(再造之恩)이나 읊조리면서 백성을 수탈의 대상 노예화로 내몰 수가 있는가? 그 현장에서 남원이라는 비껴갈 수 없는 사실에 눈 감고 싶었던 경우는 없었을까?
남원과 왜(倭)가 겹치고 겹치면서 울분이 끓어올랐고 치를 떠는 몸서리가 겹쳤습니다. 유별나게 왜, 일본과 처절한 악연에 악연이 겹치는 고장이 우리 고장 남원이었습니다. 남원과 왜의 관계는 조국과 일본과의 관계와 동일하였고 그 극한의 전시장이며 표본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우리는 구 남원역에서 그 실상의 극치를 보아야 했습니다.
수천 년의 일본과의 관계 속에서 일본 권력자들의 근성에 뿌리박힌 민족성을 읽어야 했고 현재의 위정자들의 인간일 수 없는 망언 속에서 일본을 극복하지 않는 한 한반도에 영원히 평화란 있을 수 없다는 기막힌 현실을 뼈저리고 사무치게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직도 해야 할 일이?
어느 공적인 자리에서 이제 후배들에게 일거리를 물려주어야 할 때가 되었다 했고 그래도 놀지는 않겠다는 말을 했었습니다.
후배들이 해야 할 일을 우개가 다 해버리면 후배들은 무슨 낙으로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그러니 이제 뒷바라지나 하면서 얼마일 지 모를 여생을 잘 마무리 했으면 싶었었습니다.
그런데 생업에 벅찬 후배들은 여전히 숨고르기가 어렵고, 일을 전달해야 할 정치권, 행정 계통에서는 일의 선별과 심각성과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으며, 그러다보니 시민들 역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향 감각이 흐트러져 있는 것 같아 심히 염려스러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精神一到何事不成'(정신일도하사불성)이라 했습니다. 정신을 한 곳을 모아 집중시키면 무슨 일인들 이루어내지 못하겠느냐는 것이지요?
남원인들이 모아야 할 남원의 정신은 무엇인가? 만인정신입니다. 만인정신은 곧 국가와 민족의 정신입니다. 그 정신이 대일 관계 즉 정유년 남원성 전투에서 모아진 정신이기 때문입니다.
이 만인정신의 궁극적인 이상은 전쟁과 침략과 비인간의 극치인 일본을 극복하는데 있습니다.
일본을 극복하려면 먼저 그 극복해야 할 일본을 알고 배우며 극복해야 할 까닭을 깨우치는 곳이 있어야 하는데 그 곳이 바로 남원입니다. 남원은 그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고장입니다. 그 극일을 형상화 하며 세계화 하는 작업, 이것이 만인정신을 구현해 내는 것이며 이는 곧바로 우리들의 선현, 순절하신 선열들의 소망을 구현해내는 것이면서 우리가 선현들께 해 드려야 할 당연한 도리입니다. 즉 후손으로서의 도리를 다 하는 것이 남원 정신을 구현하는 것이면서 그 만인정신이 국가 정신이 되어 극일을 완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남원 시민 모두가 달려들어 매달려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치권과 행정에서 뜻을 모으고 손잡고 발굴하고 연구하면서 시민들을 함께 이끌어 국가적 관심을 끌어 모으면 남원 정신이 국가 정신으로, 남원의 소망이 국가의 소망으로 펼쳐져 극일을 성취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 남원은 극일을 생업으로 할 수 있는 고장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일본이 그 침략적 근성을 버리고 세계에 진심과 진정을 다 하여 사과하고 개조하지 않는 이상, 일본은 미국을 제외한 세계의 적이어서 남원은 극일의 세계적 성지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꿈같은 얘기이고 고무풍선 같은 허풍일까요? 아닙니다.
어차피 우리는 오늘의 우리와 오늘의 국가와 오늘의 민족이 있게 해 주신 선열들에게 그에 상응하는 예를 갖추어야 하며, 그 선열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구조적 장치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후손으로서의 도리입니다.
우리가 일본에 시달리고 또 시달리다가 종래는 먹혀버리는 비극으로 점철해 왔던 것은 선열들의 목소리를 외면해 왔고 사대(事大)라는 외세에 의존해 왔으며 기억해야 할 것을 잊으려 뿌리치면서 기억의 장치를 묻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를 살려내는 일을 누가 해야 하는 것일까요?
우개는 천부지지 옥야백리 남원에서 한 때 헤매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높아서 곤란했던 자부심과 자긍심에 충족되지 않아서였습니다. 그러나 살면 살수록, 보면 볼수록, 파면 팔수록 더 할 나위 없이 훌륭한 삶의 터전이 남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문화 예술에 탁월한 향토의 품격에 톺으면 높을수록 좋은 향토에 대한 자존심과 자긍심이 충족되었습니다. 그러나 한 발 짝 넘어서니 피비린내였습니다. 우리 선조 위정자들의 탐학과 수탈도 문제였지만 왜(倭), 일본(日本)때문이었습니다.
선현들께서 이어 받아 받들어야 할 사명감이 무겁게 어깨를 짓눌렀습니다. 여러 번 생각해 봤고 따져도 보았습니다. 나라도 나서야 되겠다 싶어서 여러 방향으로 우리의 뜻을 전달해 보려 했습니다. 그러나 힘과 재주와 표현이 미숙했겠지요.
후배들에게 짐을 넘겨야 할 단계가 됐다 싶으면서도 아직은 하는 데 까지 해 봐야 된다는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욕심일까요?
분명한 것은 우개의 생각이 잘못 되지 않았다는 신념입니다.
일본의 위정자들이 참회, 회개하지 않는 이상 한반도와 아시아에 평화는 없다.
그런데 그럴 가능성은 없다. 그렇다면 한반도의 평화는 오직 극일에 있을 뿐이라는 신념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남원은 극일의 성지가 되어야 합니다. 극일의 성지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 원점이 남원성 북문터, 구 남원역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남원인 으로서의 도리이고 의무라는 것입니다. 우개가 지금 남원에 살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맙습니다.
2019. 6 |
